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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시라노

시라노 #01

2019년 8월 14일 수요일 오후 8시 00분
광림아트센터 BBCH홀 1층 B열 25번

최재웅 나하나 송원근 조현식 최호중 육현욱
김효성 문갑주 강동우 지원선 추광호 이무현 김강진 
정원철 전기수 손준범 김대식 장예원 김수정 가희 강기연 이은지 이정은 임소윤 

초연에서 내가 좋아했던 포인트들 바뀐 연출에서도 충분히 살려졌고, 사랑한다고 당당하게 말하기 어렵게 했던 아쉬웠던 점은 거의 다 보완, 해결되었다. 재연도 내 시라노로 안전하게 안착했다. 진짜 엉엉 나 울어 엉엉. 

첫공대원들 후기 보면서 걱정했던 록산의 캐릭터가, 구체적이 되었을 뿐. 내가 상상했던 충분한 또라이 록산이 거기 있어서 넘 좋았다. 초연보다 시라노와 닮은 록산이라는 걸 충분히 보여주고. 그렇지, 시라노 영혼의 쌍둥이. 록산.

가스콘에서 크리스티앙 같이 춤추는 것도 좋고 야시시 축제에 여성 시인들도 있어서 너무 좋고. 런티앙 너무 좋고. 시라노 사랑해 (고래고래)

내 빵과 시에 386이 좀 뭍긴 했지만, 나쁘게 뭍은 건 아니고, 시란 무엇인지 명확히 집는 거 매우 좋다. '외쳐 조선' 생각도 나고. 

로맨틱 웅 보는 것 짜릿하고, 쾌감 100%. 최고의 런을 보고 있고. 앓다죽을 웅런이여. 아, 진짜 나 시라노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나벼.

초연에서 '거인을 데려와'에 그림자 조명 쓴 걸 참 좋아했었다. 시라노에게 거인은 자기자신의 어둠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런데 재연의 희뿌연 구름도 나쁘지 않다. 시라노가 백 명의 장정들과 싸우기 위해 홀로 걸어갔던 밤이 구름이 짙게 낀 밤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도, 시라노의 복잡한 마음을 달을 가리고 밤하늘을 흐리게 만드는 그런 구름으로 표현한 것 같았으니까.

시라노의 극작가로서의 면모가 재연에 더 드러나는 것도 좋다. 크리스티앙과 자리를 바꾸고, 록산에게 얼굴을 드러내게 하고, 그리고 록산에게 찾아 들어가도록 문 열어주는데, 이 시퀀스에서 거의 소리지를 뻔. 무대 난입해서 훈계할 정도면 극작가 커리어가 좀 있어야하기도 하겠고.  

시라노 재연의 장면 구성이 프랑스 영화 시라노 (1990)와 비슷해 보인다. 시라노는 워낙에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된 작품이라, 뮤지컬 디벨롭을 하면서, 다양하게 참고를 했을 것인데, 뮤지컬 시라노의 2019년 버젼으로 레트로한 느낌, 촌스러운 느낌을 최대한 주면서, 캐릭터를 세련되게 하는 방식이 선택되었다. 혹시 보실 분들을 위해 미리 말씀을 드리면, 영화 시라노에서 록산 캐릭터는 뮤지컬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4차원 또라이입니다. 크리스티앙은 뮤지컬보다 훨씬 소모적인 캐릭터구요. 2019년의 뮤지컬 시라노가 지금의 20대들에게 어떻게 다가갈 지 모르겠다. 세대차이가 조금 있을 것 같은 느낌. 영화도 90년 작이라 막 그렇게 세련된 느낌은 아니다.

시라노가 록산을 사랑하게 된 이유가, 그녀가 놀림받는 자신을 지켜준 일화로 추측할 수 있는 것도 좋다. 록산도 비슷한 이유로 크리스티앙을 사랑하게 되었던 것 같고. 둘이 너무 닮아서 사랑에 대한 태도도 비슷한 것 같고. 시라노가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면서도 겸손한 것과 시대적 한계를 갖고 있는 여성 록산이, 자신의 장애물 앞에서도, 재능을 아끼지 않고 (시라노처럼) 더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는 건 조금 대비가 된다. 누군가를 돕기만 할 뿐,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지 않고 다 알아서 하는 시라노지만, 유일하게 그를 도울 기회를 가졌던 록산, 마찬가지로 무슨 일이든 알아서 다 잘하는 능동적인 록산이지만 살면서 처음 받은 (기대치 않은) 정의로움과 친절에는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운명을 느끼는 록산.

발코니 씬 정말 눈물이 나죠. 시라노가 록산에게 말하는 동안 어둠에 숨어 그것을 듣고 있는 크리스티앙이 안쓰러워 울고, 둘의 자리가 바뀐 뒤, 록산이 크리스티앙에게 말하는 동안에는 그 말을 자기의 것으로 들을 수 없는 시라노가 안쓰러워 운다. (그리고 이 둘에게 놀아나는 록산도 안타까워 ㅠㅠ)

그래도 이 정도면 록산에게 잘 해주는 것 같다. 시라노의 유일한 바람은 자신을 닮은 록산이 자기자신 대신에 행복해지는 것일텐데, 이 프로젝트에 군더더기란 없는 시라노는 정말 훌륭한 극작가인 것이다. 물론 시라노가 쓴 이 극의 주인공은 록산이고, 행복과 승리는 응당 록산의 것이어야 하는 것. 시라노의 페르소나는 크리스티앙이 아닌 록산.

역시 초연충은 체질에 안맞고요, 저는 참 쉬운 덕구에요. 애초에 시라노의 촘촘한 디테일보다는, 이 캐릭터가 가진 매력, 이야기와 서사, 관계의 아이러니를 더 좋아했던 것도 있고. 

시라노 재연 총평: 감성은 20세기, 무대가 펼쳐지는 이곳은 21세기. 제작진이 내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다. 내 후기 열심히 읽은거야? 그런거야?  

드기슈도 좋다... 검이 닿는 챙챙 소리에서 록산에게 사랑을 느끼고 청혼을 하는 것도... 이 드기슈에 쉽게 애정을 주지 못하고 불만족을 드러내는 사람들.. 루키즘이 심하네... 라는 생각을 조금 했다 

시라노 전체적으로 험블해진 것도 너무 시라노 같다고 느끼는 점. 용맹한 검술과 화려하고 날카로운 언변을 갖고 있으면서도, 외양만은 추레한 게. 극같고 그래... 물론 이 지점이 제일 386스러운 점이지만... 초연때도 앙들 페이 잘 챙겨줬다고 들었고 으싸으쌰 내부 분위기도 좋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제작진이 이 정도 수준에서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무리가 없다고 판단했다면 그 판단도 존중함. 의도가 있고, 내가 그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다, 그래서 극을 받아들이는 데 큰 문제가 없다. 표 값은 조금 비싼 감이 있지만, 앞으로 할인 많이 풀어줄 거라 기대하고요. 꼭대기 날아올라서 전관도 하고 싶어. 1일 1시라노 가능한가. 

사실 초연 크리스티앙 너무 올려쳐줬었는데 (내가 삼키고 넘긴 말이 많았구나) 재연에서 캐 보정되어서 좋다. 크리스티앙의 죄는 뭘까요? 애초에 시라노의 코가 아니었으면 그의 자리는 없었는데도, 단 한 번도 시라노를 연적으로 의심한 적이 없다는 것. 아마도 시라노의 외모때문이겠지. 시라노를 동경해서 가스콘에 들어왔는데, 록산 만도 못해. 인정받을 생각만 있지. 시라노를 멋지다고 생각하는데, 연적이란 생각을 못한 이유 뭐야. 록산같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이지. 

2막에서는 시라노와 크리스티앙의 전투씬이 제일 좋았다. 전투씬이라 쓰고 결투씬이라 읽고요.  크리스티앙이 낼 수 있는 최대의 용기와 패기,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불안 속의 싸움이었을 것이다. '시라노' 라는 연적. 멋있었어 크리스티앙. 너 진짜 멋지게 죽었다고. 그리고 록산과 시라노에게 제대로 엿을 먹였네.. 나름의 승리. 초연의 록산이 진실을 알았을 때 크리스티앙을 선택했을 거라 짐작한다면, 재연의 록산은 시라노와 크리스티앙 둘 사이에서 고민을 꽤나 하겠지만, 결국은 시라노일 것 같은 느낌이다. 결투씬 너무 감동적이었다. 진심으로 달려드는 크리스티앙을 진심으로 상대하지 않고 여전히 모른척 거짓말하며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시라노의 죄. 진짜 시라노가 연적이면 너무 무서울 것도 같다. 록산이랑 시라노랑 이렇게 닮았는데, 이 둘과 개별적 관계를 갖는 유일한 캐릭터인 크리스티앙에게 이 진실이 얼마나 뼈아플지. 록산과 클티앙이 닮았다는 것도 크리스티앙이 누구보다 잘 알겠지. 삶은 어디서나 전쟁터구나, 크리스티앙.

그냥 시나 어려운 소설속에 있는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손에 잡히는 사랑이야기를 전하려고 애쓴 것 같다. 눈이 가려진 록산, 코를 가리고 싶은 시라노, 입이 닫힌 크리스티앙의 사진이 필요한 연출은 아니다. 상징은 모두 제거하고, 우리가 이 이야기를 가까이 느끼도록 만듬. 아마도 이 극의 미감이 전반적으로 망가진 이유이기도 할 거다. 삶은 온통 전쟁터이니, 인간은 누구도 완벽하지 않고, 저기의 시라노나 록산이나 크리스티앙이나 객석에 앉아있는 관객이나 크게 다른 인간은 아니라는 것. 별세계가 보고싶어서 극장에 오기도 하지만, 나 자신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만나고 느끼고 싶어서 극장에 오기도 하는 것.  

여러분 사랑을 믿나요. 아저씨가 사랑을 해 본 적이 있다면 제가 말하지 않아도 아실거고, 사랑을 해 본 적이 없다면 제가 아무리 말해도 모르실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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