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시라노

시라노 #02

bluecotton 2018. 4. 12. 22:14

2017년 7월 26일 수요일 오후 3시 00분

LG아트센터 6열 10


시라노 역을 하는 배우가, 이 말이 자기의 말이 아닌 것을 들키면 절대 안된다고 생각한다. 실력이 너무 드러나는 극이고, 뎅라노의 노선, 잡아내기 쉽지 않다. 델리버리가 약한데, 너무나 과한 노선이라, 이 시라노를 사랑하기 정말 쉽지 않은. 기본적으로 극에 대한 애정이 있기 때문에, 나의 기대치도 높은 것 같고. 


마음에 쏙 드는 넘버 "빵과 시" - 원제는 "페스트리와 시" 이지만 나는 그냥 이렇게 부를래. 영양보다는 모양과 풍미가 우선인 페스트리와 미사여구 가득한 시는 같은 의미로 쓰인 상징이기는 하지만, 나는 몸의 양식과 마음의 양식으로 대조하고 싶어서 빵과 시. 


"언제까지 그러고 살텐가" 이 대사 너무 좋아하는데, 시라노는 그러고 살다 죽지. 


개인적으로 가장 많이 이입하는 캐릭터는 '록산', 그래서 2막의 말미에 시라노 캐의 빻음을 용납할 수가 없는 것 같고. 


애인 생기면 가장 받고싶은 건, 늘 마음을 담은 편지였다. 고딩때부터 너무나 문과고 책 많이 읽고 깊게 읽고 말 잘하고 글 잘쓰는 사람들 너무 많이 만났고 그들과 편지 서로 많이 나눴지만, 그리고 그 중엔 드기슈가 보낸 것 같은 편지들도 있지만. 어떤 편지는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도 보면 끙끙 앓으며 마음을 주체할 수 없을만큼 좋기도 하다. 그 때의 그 사람은 이제 없지만, 당시 그의 마음은, 그를 향했던 내 마음은 온전히 글로 남아서 오랫동안 그리워지는 것.


록산이 원했던 편지가 시라노의 편지가 아닌, 크리스티앙의 편지였다는 게 중요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해주는 것. 시라노에게 가장 짜증나는 지점은, 그는 애초에 그녀를 사랑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것과, 사랑하는 사람이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인지 왜 몰랐으며, 알았다면 왜 무시했냐는 건데. 록산이 무슨 자신의 뮤즈라고 되는 것인양, 시를 쓰기 위해 록산이 필요했는지 록산을 사랑하기 위해 시가 필요했는지 모호하다는 데 있음. 전자의 혐의를 벗을만한 증거는 부족하고. 


오히려 나중에 자신이 록산을 기만했다는 걸 깨달은 크리스티앙이, 어떤 대상화된 존재로서가 아닌 거기 살아있는 사람으로서의 록산을 훨씬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로 록산에게 선택의 기회가 있었다면, 록산은 크리스티앙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자둘 하면서 록산의 죄가 무엇인지 열심히 들여다 보았는데 "드기슈를 기만한 죄"가 있더란. 하지만 중요한 건 록산은 드기슈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고, 적어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기만한 적 없이 최선을 다했다.


여캐 자체의 문제와, 여캐를 다루는 방식의 문제는 분명 다르고, 현주배우는, 완벽하진 않지만 사랑스럽고 매력적인 캐릭터를 최대한 표현해내고 있는데, 너무 잘 표현하고 있어서 후자의 문제가 더 두드러지는 것 같다. 저렇게 예쁘고 영민하고 능동적이고 지적인 여자에게 선택할 남자가 크리스티앙, 시라노 아니면 드기슈 뿐이라는 게 참. 나 너무 혼자서 뮤지컬 "록산"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근데 이러고 골똘히 생각하다 결국 찾아서 채워넣게 될까봐 걱정인 것. 현실에선 시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의 손을 잡았지만, 눈은 항상 시인들을 향해있으니.


프레임만 남겨 표현한 시라노의 무대 정말 사랑하는데, 뼈대는 마음이고, 거기에 살을 붙여 아름답게 꾸미는 것은 시 - 무대로 말하면 배우들의 연기와 노래와 춤, 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서 의미가 있고 또 예쁘기까지 한 것. 그 무대에서 "그림자"의 의미까지 찾아낼 수 있다면 찾아야 할 건 다 찾은 상태로 세 번 째 시라노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